순 례 자
( pilgrim 巡 禮 者 )
시작하는 기도 - 빛을 준비하는 라엘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의 모포 위를 지나고, 이윽고 그의 눈가에까지 올라와 눈꺼풀 위로 오늘도 어두운 밤이 지났음을 알렸을 때야 비로소 그는 아침이 왔음을 깨달았다.
“아아하아으음.”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으며 기지개를 편 그는 반쯤 감긴 눈 그대로 고개를 자우로 몇 번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그의 눈에 가득 찬다. 몸도 여느 때보다 가볍다. ‘오늘은 맘에 드는 아침이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기분도 괜히 한껏 좋아졌다. 분명, 그 파아란 하늘만 보이는 창문 밖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기도문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애로우신 빛과 회복의 라엘이시여. 오늘도…』
그는 번개라도 맞은 양 잠시 그대로 창문을 바라본 체 멈춰버렸다. 이런, 분명히 미사 종소리를 못 들었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난 그는 잠옷을 얼른 벗어 던지고 흰색의 단조로운 위아래 옷을 허겁지겁 입기 시작했다. 흰색의 작은 로브를 착용하는 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그는 책상 위에 있는 라엘의 경을 집어 들고는 그의 방을 재빠르게 뛰쳐나오면서 생각했다.
가만, 오늘 설교자가 누구였지?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낮은 자들은 각각의 그 삶 속에서 더 밝고 즐겁게 살되, 그곳에서 주어진 의무와 책임들은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작지만 근엄한 목소리로 라엘 신전의 성단에서 은혜로운 설교가 마무리로 넘어갈 때쯤, 오늘의 설교자, 흰 머리 노인 파브르의 눈에 저 멀리 있어도 한눈에 잘 보이는 경배당 입구가 조용히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파브르의 한쪽 입고리가 살짝 올라가는 모습을 어쩌면 성단과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던 신자들은 보았을지 모르겠다.
“…우리 하이드 수련사들의 삶이, 속세를 등진 루니카 수도사들의 삶보다 외형적인 제약은 훨씬 덜 할지라도, 음, 분명히-예,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분.명.히입니다- 라엘께서는 수련사들에게도 똑같이 수도사들처럼 기본적인 미사에 늦지 말 것을 바라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루 수련사?”
조용히 경배당 문을 열고 들어오던 마루는, 방금 막 경배당의 오른편 맨 뒤에서 세 번째 줄의 긴 의자에 앉으려 할 때 불린 자신의 이름에 힘이 빠져 고개를 푹 숙이고 스러지듯 앉았다. 마루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힘없이 대답했다.
“라엘의 빛으로 맹세코, 그렇습니다.”
이미 진작 먼저 와서 왼편 앞줄부터 채워 앉아 설교자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었을 수련사들의 자리 쪽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마루의 귀까지 들려왔다. 이제는 누구나 볼 수 있게끔 보다 한껏 더 올라간 설교자의 미소를 보며 마루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하필 설교자가 파브르 감독님이시라니.
파브르 감독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순례 여정 때문에 심장이 벌렁 벌렁 거려서 잠도 잘 안 오고하는 것, 이 낮은 자도 겪었으니 다 이해하지요. 아마 여기 계신 신자 분들이라도 다 그 심정을 경험하진 않겠지만 이해는 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살짝 떠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인 미사만큼은 늦지 않게 와야지 우리 후배 수련사들도 보고 많은 것을 배우지 않겠습니까, 마루 수련사?”
소리 죽여 조용히 웃던 수련사들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진 것을 느낀 마루는 좀 더 고개를 떨어뜨려 두 손에 쥐어있는 애꿎은 라엘의 경만 바라보았고, 이에 충분한 만족감을 느낀 파브르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낮은 자는 마루 수련사를 언급하며 이야기 했지만, 비단 마루 수련사에게만 하는 말이 아님을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이후 계속되는 설교와 미사 순서들까지, 마루에게는 왠지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경배당을 나오면서, 수련사 가르시아는 질렸다는 듯 마루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야, 마루, 너 대단하더라? 어떻게 순례 여정 떠나기 전 마지막 주까지 미사에 늦을 수 있냐?”
“아냐. 난 분명히 잠도 일찍 잤어. 감독님 말씀처럼 막 설레어서 잠 설치고 한 것도 아니라고. 꼭 미사 종소리 들으면 일어나야겠다고 마음도 먹었는데… 오늘 종 친 거 확실해? 이상하네…”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마루를 보며 가르시아는 웃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냐. 네가 못들은 거지, 뭐. 여하튼 오늘도 덕분에 졸리지 않은 미사가 되어서 참 고맙게 생각한다. 하하하”
“아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일게.”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자유지만.”
언제나처럼 별 의미 없는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수련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뒤에서 마루를 부르는 한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들렸다.
“마루 수련사! 낮은 자와 이야기 좀 하지.”
굳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아는 그들의 발걸음은 급작스레 지금까지보다 조금 빨라졌다. 물론 그들의 그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뒤에서 마루를 부르는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 어느덧 그 소리의 톤이 조금 더 높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어이! 지금 낮은 자를 피하는 건가? 거기 못서겠나?”
아까부터 마루와 함께 발걸음 속도를 조금씩 높이던 가르시아는 마루를 부르던 목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될 즈음 그의 친구를 보며 난처한 듯 어깨를 들썩이고는,
“아, 마루! 잊고 있었는데… 나 이만 라엘의 경 공부시간이 되어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하며 옆으로 스윽 빠져 다른 길로 가버렸다. 마루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벌써 다른 방향으로 사라져버리는 자신의 친구를 향해, 신전 안에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라엘께서 싫어하실 만한 서너 가지의 마을을 마음속으로 내뱉었다.
그렇게 상황이 점점 더 불리해지자 마루는 아예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조금 뒤, 이제는 좇는 사람이나 좇기는 사람이나 그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곧 뒤쪽에서 협상을 제의하는 목소리가 힘겹게 들려왔다.
“마루 수련사! 허억, 지금 당장 거기 서지 않으면, 후악, 순례 여정에 들어가기에 앞서, 후아악, 천국과 지옥을 차례대로 보여주겠네! 허억허억, 거기 서게나! 후욱, 지금 거기 서면 천국만 보여주지!”
…어느 쪽이든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마루는 계속 달리면서, 하지만 결코 뒤는 돌아보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전 신학과정은 다 끝났다고요! 헉헉,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하악, 신성마법은 더 배울 필요가 없다, 허억, 니까요! 후욱, 더 늘지도 않는다는 거, 허어헉, 잘 아시잖아요!”
“그건 자네 생각, 헉허억, 이라니까! 헉헉, 순례 여정 떠나기 전날까지도 열심히 연습해야하는 게 바로 신성마법, 헉헉, 이라네! 진짜 순례 여정 때는, 하악, 회복계 마법 한 개 한 개가 아쉽다고, 허억허억, 얼마나 이야기해야 알아듣겠나!”
“그거야 말로, 헉, 레스 사제님 생각이라니까요! 허억, 무슨 2차 제국전쟁 때도 아니고!”
신전 안의 수많은 수련사들과 사제들, 그리고 신자들에게 달리면서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대화하는 이상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던 그들은 그렇게 수십 분의 해프닝 끝에 결국 마루의 귀가 레스 사제의 손에 잡혀 신성마법실로 끌려가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 ※ ※ ※ ※ ※ ※
카이사린의 대신전.
그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사람들이 대신전의 경배당에서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부모의 손을 맞잡고 깡충깡충 뛰며 내려오는 어린아이들부터 머리색이 하얘지고 걸음도 약간은 불편해 보이는 노파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큰 무리였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같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느 때보다도 그들은 더더욱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라엘의 은총이 각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득하게 찬 것임에 틀림없다.
그 꽤나 길게 내려오는 사람들의 행렬 중에는 물론 이곳, 카이사린 대신전에서 각각의 능력에 맞게 분배된 직분을 수행하는 흰 로브를 두른 사제들의 무리도 있었다. 그 중 몇몇 사제들은 서로 조금 전 들었던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과연 제국 전쟁을 이렇게 해석하시다니… 그 분의 지혜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신 것 같군.”
“그러게 말일세. 여기까지 와서 직접 그 분의 설교를 들었던 타지방 사람들도 그 들였던 시간들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네. 아니, 그 시간들로 인해 이미 축복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까지 드는군.”
“자네도 보았나? 루인의 대주교님께서 그렇게 감동하시는 걸 낮은 자는 처음 보았다네.”
“허허. 그렇다면 말 다했지. 그분조차 감동시키시다니… 아니, 당연한 건가.”
“그러니까 거룩한 대지에 계신 분 아니겠나. 루인의 대주교님의 지혜보다도 더 높은 경지의 지혜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 대면하니 이 낮은 자가 한없이 낮아지는군.”
이들은 그 마음속에 한없는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그 경외심의 대상은, 같은 인간이고 같은 신을 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비록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걸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세실 역시 이러한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사실, 오히려, 세실은 그 누구보다도 더 놀랐다. 그는 그 긴 계단을 사제들의 무리와 함께 내려오면서 내내 오늘 들었던 설교내용만 회상하고 있었다.
포온 제국의 전쟁이 라엘의 뜻이라니.
분명 여태까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였지만, 오늘 그 분의 설교를 들은 세실의 생각은 벌써 많이 달라져 버렸다. 제국도 케미크도, 그리고, 라엘께서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그가 보고 말았던 슬픈 흔적들을 회상하며 품었던 수많은 감정들이 공허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슬픈 일이다. 오, 라파에레스크. 란세롯. 카세리니아. 카스피. 시즐. 그 외, 이젠 그 이름조차도 남겨져 있지 않은… 비극의 마을들이여.
놀라운 가르침에 후련함뿐 아니라 비참함, 공허함 또한 함께 느끼며, 세실은 사제의 무리에 섞여 자신의 방으로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에드먼드, 맞으십니까?”
세실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몇 보 앞에 어느 샌가 검은색 옷에 희고 긴 망토를 두르고 목에는 푸른 목걸이를 하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세실은 곧 그 푸른 목걸이가 라엘의 성기사 표식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발걸음을 멈추어 대답했다.
“예, 낮은 자가 에드먼드 프라안입니다만.”
“제대로 찾았군요. 케미크의 대신전이라 사제님들이 많아서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꽤나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케미크 왕국에서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실은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웃으며 기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제국에서는 검은 머리나 검은 눈동자를 많이 찾아볼 수 있지요. 대체로 칸의 자손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기사의 말이 조금 길어지려고 하자, 세실은 조금 난처한 듯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저, 낮은 자가 지금 좀 생각할 거리가 많…”
그제야 기사는 세실을 찾아 온 자신의 원래 목적을 떠올리고 헛기침을 몇 번하며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헛, 아흠, 흠. 예, 낮은 자가 잠시 다른 이야기로 빠졌군요. 죄송합니다. 사실 낮은 자가 당신을 찾은 건 중요한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 그렇다면 이제 그 중요한 말씀을 들어도 되겠습니까?”
미소 띤 세실의 질문에 넉살 좋은 그 기사는 주위를 약간 의식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성하께서 세실 에드먼드 프라안 사제를 찾으십니다.”
기사의 말을 들은 세실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성하께서 낮은 자를, 말씀이십니까?”
놀라는, 그런 세실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사는 웃으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카이사린 대신전의 치유사제, 세실 에드먼드 프라안 사제. 빛과 회복의 라엘 교황 성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낮은 자같이 낮은 자를 성하 같으신 분이 왜…”
세실은 놀라서 조용히 혼잣말을 하다가 다시 기사에게 물었다.
“혹시 기사께서는 성하께서 낮은 자를 찾으시는 이유를 알고계십니까?”
기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글쎄요. 성하께서 누군가를 부르시는 이유를 낮은 자 같이 낮은 자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낮은 자의 임무는 성하의 명을 받아 모시고 오는 것입니다. 낮은 자에게 더 많은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사제께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합니다.”
세실은 놀란 마음을 여전히 드러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낮은 자는 지금 정말 놀랐습니다. 성하께서 낮은 자를 찾으시는 것도 그렇지만, 낮은 자의 이름까지 알고 계시는 것부터 이미 낮은 자에겐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마치 유명인이라도 된 느낌이군요. 아니, 성하께서는 혹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신 겁니까? 그거라면 가능성이 있겠군요.”
기사의 얼굴에 웃음이 커졌다.
“하하하. 맙소사, 유머를 아시는 분이시군요. 성하께서도 인간이십니다. 결코 그럴 리가 없다는 것, 잘 아실 텐데요. 사실은 말입니다,”
기사는 약간 고개를 숙여 입을 세실의 귀에 가까이 대고 조금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낮은 자도 다른 건 잘 모릅니다만… 거룩한 대지에서, 그것도 성하의 가까운 주변인들에게는 더욱더, 당신이 유명인임은 확실한 사실이지요.”
“예?”
“단언컨대, 라엘의 빛으로 맹세코, 거룩한 대지에서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예에? 무슨 말씀이신…”
기사는 ‘아차차’하며 머리를 딱 치고는 말했다.
“또 낮은 자가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버리고 있었군요. 성하께서 많이 기다리시겠습니다. 지금 아마 대주교실에서 카이사린의 대주교님과 말씀 나누시고 계실 겁니다. 벌써 많이 늦었군요. 죄송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또 하도록 합시다. 자, 그럼 따라오시지요.”
기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벌써 먼저 앞장서서 대주교실을 향해 걸음을 때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당황한 세실은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그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제법 넓은 방 안 한 가운데에는 직사각형의 탁자가 놓여있다. 그 탁자의 주위를 둘러 앉아있는 사람들은 흰머리만 무성한 세 명의 노인들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라엘 교단을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이다. 그런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모여 나누는 이야기는 최근에 거룩한 대지에서 가장 관심사로 떠오르는 한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
“카세리니아, 아니지, 지금은 리켈인가. 그곳에서의 사역이 시작이었지?”
“예, 성하. 그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신성마법으로 나병까지 치료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낮은 자는 진짜 에드먼드 라에린 사도가 다시 환생한 줄 알았습니다.”
“낮은 자 또한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나병은 라엘께서 내리신 저주라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까?”
“라엘께서는 저주를 내리시는 신이 아니라네. 어떠한 질병이든 고치시는 신이신 것이지. 온전한 빛에는 어둠이 조금도 간섭할 수 없는 이치라고 할 수 있네.”
“과연. 낮은 자의 믿음이 적은 탓입니다.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낮은 자에게도 있었습니다.”
“그 수련사의 행적이 무지하고 믿음이 적었던 낮은 자들에게 새로운 믿음과 깨우침을 준 것이지요. 라엘께 감사드리며. 서품명이 에드먼드…라고 하셨습니까, 성하?”
“그렇다네. 세실 에드먼드 프라안 사제이지. 지극히 낮은 자가 마침 구별된 기사 중 한 명을 통해 이리로 불러 달라 부탁했네. 카이사린 대주교께서는 그 자를 잘 알지 않으신가?”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성하. 사실 그가 여기서 신성마법을 교육받을 때 이미 카이사린에서는 엄청난 치유사가 될 거라고 소문이 자자했지요. 물론 낮은 자조차 그 자가 나병환자를 치유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랬군. 어쨌건 여기에 모인 이 낮은 자들이 훨씬 더 주목해야할 것은 한 사제의 그런 비법한 능력이 아니라 한 사제에게 그런 능력을 입히신 라엘께서 이제부터 행하실 역사라고 말할 수 있네.”
“그렇습니다, 성하.” “그렇지요, 성하.”
그 때였다. 문 저편에서 노크소리와 함께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실 에드먼드 프라안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세 명의 노인 중 성하라고 불렸던, 탁자의 가운데에 앉은 노인이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오시게.”
다른 두 노인의 시선도 그 문 쪽으로 자연스레 향했다. 끼익 하는 나무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단정함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검은 머리와 매우 깊어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눈에 띄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눈매가 부드러웠지만 한쪽 눈의 시력이 나빠서인지 오른쪽 눈에 착용하고 있는 작은 외안경 때문에 그 매력이 조금 감추어진 듯 보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라엘의 경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깊게 숙여 지극히 낮은 자에게 대한 예를 표했다.
“빛과 회복의 큰 은혜가 지극히 낮은 자에게 먼저 임하기를 원합니다.”
곧 지극히 낮은 자, 성하라고도 불리는 그 노인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라엘께서 지극히 낮은 자에게 은혜를 구한 이 낮고도 낮은 자를 특별히 기억하소서.”
간이예식을 마친 세실은 조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축복하고 밝게 웃는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세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낮은 자를 찾으셨습니까?”
“그렇다네. 괜찮다면 여기 앉아서 같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시간이 어떠신가?”
“괜찮습니다. 오히려, 성하께서 직접 불러주셨으니 만사를 제쳐두고라도 왔을 것입니다.”
빛과 회복의 라엘 교황은 서있는 세실을 자리에 앉혔고 그도 그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아까부터 세실을 쭉 지켜보던 루인의 대주교도 웃으며 말했다.
“용모가 참 단정하고 좋은 청년이군요.”
자신을 향한 칭찬에 세실이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낮은 자에게는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루인 대주교님.”
카이사린의 대주교 역시 그를 바라보며 그의 겸손한 태도에 미소 짓고는 다시 라엘 교황을 바라보았다. 루인의 대주교도, 고개를 숙였던 세실도 다시 라엘 교황을 바라보았다.
라엘 교황은 이제 이야기에 필요한 사람들이 다 모였기에 슬슬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라엘의 빛으로 맹세코, 지금부터 여기에 모인 이 낮은 자들께서 듣게 될 이야기는 라엘께서 지극히 낮은 자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들이라네. 라엘의 경과 라엘의 목걸이를 통해서 재차 확인된 확실한 그분의 뜻이지.”
※ ※ ※ ※ ※ ※ ※
역시나 기대대로, 상당히 부진한 실력을 보여주는 마루를 보며 레스는 한숨을 쉬었다.
당장 오는 성일 전날이 순례 여정 출발일인데 이대로 괜찮을까. 이 녀석이 분명할 텐데. 라엘께서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이런 녀석을.
이미 며칠 전부터 많은 생각을 해본 그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을 하고서 그의 목에서 그가 차고 있던 것을 벗었다.
원체 신성력 운용을 어려워하는 마루가 오늘 하루에만 벌써 수십 번의 신성력을 운용했으니 피곤한 것도 당연하다. 기진맥진해서 탁자에 엎드려 있던 그는 멀뚱멀뚱 레스가 하는 행동을 보고 있었다. 레스의 손에 들린 것은 자신의 목에서 막 풀어낸 조그마한 목걸이였다. 레스가 마루에게 다가와 그 목걸이를 건네어주며 말했다.
“라엘의 목걸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지. 마루 수련사같이 신성마법의 능력이 아주 부진한 자들을 위한 라엘의 특별한 은총이라고나 할까. 그저 이 낮은 자에겐 마루 수련사를 위한 맞춤형 물건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라, 마루 수련사의 순례 여정 동안에만 잠시 빌려주기로 했네. 절대, 어떤 일과 무슨 일이 동시에 일어나도, 라엘의 빛에 맹세코, 타인에게 양도 금지라는 조건 하에서.”
마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스를 바라보았다. 레스가 손을 더 들이밀어 재촉했다.
“안 받고 뭐하나?”
재촉하는 레스의 태도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마루는 받아 든 목걸이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말했다.
“…어쨌든 좋은 물건인거 같은데,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거 맞죠?”
레스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면서 그의 목과 이마 쪽에 핏줄이 섰다.
“당연히 감사해야지! 이 목걸이로 말하자면 웨스에서 몇 개 없는 귀한 성물인데, 이걸 차고 있으면 자네의 그 가장 간단한 회복마법 몇 번 쓰기에도 부족한 신성력의 운용에 조금 더 보탬이 될 걸세.”
“예? 아, 예.”
자신의 말에 대충대충 대답하는 마루를 보자 레스는 마음속으로 라엘의 이름을 부르며 이를 꼭 깨문 체 화를 삭였다. 그런 레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루는 아무런 감흥없이 좀 더 목걸이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목에 채웠다. 그리고는 손으로 다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흠, 그런데 이거, 디자인이 별로인데…”
오 맙소사, 라엘이여. 낮은 자를 한번만 더 용서해 주소서!
조용하고 빠르게 기도를 드리는 것과 동시에 레스는 그의 오른팔에 신성력을 집중시켰다. 순식간에 레스의 오른팔이 하얀 빛으로 덮였다. 마루는 그제야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요 근래 들어 라엘의 축복이 마루 수련사에겐 좀 부족했던 것 같군. 라엘의 축복 좀 받게나. 에잇!”
팍하는 청아한 소리와 함께 마루의 뒤통수가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에게 말 못할 고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이 폭력 사제!”
마루가 쓸 데 없이 한 마디 더 붙였다가 호되게 몇 대 더 얻어맞고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 밤이었다. 마루는 피곤했는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라엘의 경을 놓고 그대로 침상에 엎드러졌다.
“아야얏.”
목에 목걸이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마루는 거치적거리는 목걸이를 풀어서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올렸다.
이렇게 챙겨주시다니, 그래도 고마우신 분이야.
라엘의 목걸이라는 걸 챙겨준 레스 사제에게 늘 대했던 것처럼 장난스럽고 퉁명스럽게 대했지만 사실 그는 마루에게 언제나 고마운 존재였다. 아플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고아였던 그를 -비록 다소 과격했지만-사랑으로 대해주곤 했던 -다소 과격한-어머니 같은 존재인 것이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늘 레스 사제의 목에 걸려있던, 상징과 같은 그 목걸이를 갑작스럽지만 막상 받고나니 이젠 정말 하이드를 떠난다는 것을 실감하는 마루였다.
순례 여정. 이젠 라엘 교단에서 밖에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오랜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체험적인 신학 공부. 그래, 이제 이 여정만 끝나면 나도 라엘의 빛을 전하는 또 한 명의 낮은 자가 되는 거야.
2년 전 어느 날, 한 명의 순례자를 보며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던 마루는 다시 한 번 그날을 떠올리며,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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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입니다. 군대 안에서 쓴 글을 내 컴퓨터로 옮기고 올립니다.
재미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대한 재밌게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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